타고난 기질이 예민한 아이 첫째딸 도연이는 우리 부부의 걱정이었다. 도연이처럼 예민함을 장착하고 태어난 아이는 다른 성향의 아이에 비해 불안이 많고 까다로운 기질의 확률이 높다. 조심성도 많다. 이런 특성 때문이었을까. 한 두살 무렵 문화센터에 다녔을 때도 활짝 웃어주며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한 일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도연이에게 일주일에 한번 가는 문화센터는 항상 낯설고 불안한 장소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랬던 도연이가 5살이 되더니 언제 그랬냐는듯 적극적이고 당찬 아이로 변했다. 유치원에서는 조잘조잘 말도 잘하고 발표도 잘한다고 한다. 얼마전 여름방학, 도연이가 어렸을 적 문화센터에 함께 다닌 친구 가족과 여행을 갔다. 바뀐 도연이를 보더니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비결’을 알려달라며 물었다.
흐음… 비결?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한 비결은 없다. 그나마의 비결이 있다면… 타고난 성향을 180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부모의 노력으로 예민함을 ‘견뎌내는 힘’은 만들어줄 수 있다는 내 마인드이지 않을까? 그리고 이 힘은 부모의 지지와 사랑의 표현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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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질이 예민한 아이에게 ‘예민함’이라는 단어는 사용금지
어렸을 적 나도 예민한 아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며 예민함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예민한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어른들의 대화를 통해 어렴풋이 ‘예민한 아이 = 키우기 힘든 아이, 좋지 않은 성격’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겼다. 그리고 이는 내 최대 단점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내 예민함을 숨기고자 집 밖에서는 더 밝은 척을 했고 불편함을 견뎠다. 밖에서 이렇게 생활하다보니 집에서는 당연히 예민함이 배로 증폭되어 분출됐다. 이런 날 보는 가족들은 또 다시 말했다.
“넌 너무 예민해. 그렇게 예민해서 어떻게 할래”
다행히 내성적인 성격은 아니어서 학교 생활에 문제는 없었다. 자신감있게 이것저것 도전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감있게 행동한 이면에는 ‘예민한데 이것까지 못하면 되겠어? 이것도 못하면 내세울 게 없잖아’라는 소심함이 있었다. 물론 행동한 이유가 무엇이든 얻은 것도 많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경험을 했으니까. 다만 난 자신감은 있었지만 날 사랑하고 존중하는 자존감은 없었다.
“이렇게 예민해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해”
“예민하니까 그렇지”
“예민해서 힘들겠다 너도”
내가 절대 도연이한테 하지 않으려 다짐한 말이다. 예민함이라는 단어에 부정적 의미를 더하는 말. 이런 말을 반복적으로 듣고 자란 아이는 자존감이 높을 수 없다. 날 사랑하는 마음이 길러질 수 없다. 난 도연이가 예민하기 때문에 해낼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예민한 아이 특유의 섬세함과 소통능력으로 해낼 수 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다! 예민함이 장애물이 되어 본인을 자책하고 포기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기질이 예민한 아이와의 올바른 감정소통은 아이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든다.
나는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 훈육이 끝났을 때는 물론 맛있는 걸 먹을 때, 좋은 곳에 놀러갔을 때, 눈이 마주쳤을 때 등등 수시로 사랑의 표현을 한다.
“도연아, 엄마는 도연이랑 이렇게 맛있는 걸 먹고 있어서 너무 좋아. 사랑해~”
“도연아, 엄마는 도연이랑 이야기 나누는 게 너무 좋아. 사랑해~”
어느날은 도연이가 물었다.
“엄마는 나를 왜 사랑해?”
순간 멈칫했다. 이런 게 궁금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도연이를 왜 사랑하냐구? 그거야 엄마가 낳은 딸이니까 그렇지~ 엄마는 도연이가 무얼하든지 언제나 사랑해. 엄마가 항상 도연이는 엄마의 반짝이는 보물이라고 말하지? 첫번째 보물이니까 더더더 사랑하지”
대답을 듣고서 도연이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렇게 표현해 왔기 때문일까. 도연이도 이제 스스럼없이 본인의 감정을 이야기한다. 뜬금없이 사랑 고백을 해서 날 웃게 만들기도 하고, 본인이 너무 기분 좋을 땐 얘가 왜 이럴까 싶을 정도로 표현하기도 한다 ㅎㅎ 물론 난 언제나 두 팔 벌려 그 사랑을 활짝 받아준다.
이제 도연이는 본인의 나쁜 감정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곧잘 이야기한다. 물론 화가 난 직후에는 엄마가 밉다고 소리도 지르고 짜증을 낸다. 여과없이 1차적인 감정을 풀어내고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그리고 인형에게 이야기하거나 혼자 중얼거리며 본인의 화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한다. 한참 후에 내가 도연이 이름을 불러서 나오거나 스스로 방에서 걸어나온다. 그러고는 내 손을 잡으며 말한다.
이제 화가 좀 괜찮아졌어.
짜증이 나, 마음이 이상해, 기분이 안 좋아, 졸려서 그런거야, 아침엔 원래 기분이 이래 등등 도연이가 화가 나거나 기분이 별로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낌없이 표현하자’는 내 다짐이 좋은 밑거름이 되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긍정적인 감정 표현에 익숙하고 그 감정을 수용받은 경험이 쌓였기 때문에 자신있게 부정적인 감정도 표현할 줄 아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했을 때도 엄마가 인정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부모는 아이가 어떤 감정을 느끼든 그 자체로 존중해주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유는 필요없다. 아이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사실이다. 긍정의 감정이면 더 환하게 받아주고 부정적 감정이라면 애써 그 감정을 지우려 노력하지 말자. 무엇때문에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는지 물어보고 우리가 해결해 줄 수 있다면 도와주면 그만이다. 우리가 해결해줄 수 없다면 스스로 감정을 추스릴 수 있도록 방법을 알려주면 된다. 감정수용에 대해 공부할 때 내가 도움을 받았던 영상을 함께 첨부한다. (예민한 아이를 키우는 또 다른 부모에게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어떤 감정이든 틀리지 않았다는 감정수용의 경험은 아이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든다. 그리고 단단히 자리잡은 마음은 견디는 힘을 만든다. 난 할 수 있다는 믿음, 난 곧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 난 소중한 존재라는 마음은 힘든 상황이 닥쳐도 아이가 와르르 무너지지 않게 중심을 잡아줄 것이다.
여전히 도연이도 예민하다. 타고난 성향을 어떻게 모두 없앨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불편함을 견디는 힘이 많이 생겼다. ‘이 정도쯤은 괜찮아’하고 쿨하게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변한 도연이를 보며 본인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을 잘 길러내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낀다.
도연이와 도준이가 공부를 잘 하고, 어떤 직업을 가지느냐는 우리 부부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말해도 막상 공부 잘 하면 내 어깨도 으쓱하겠지만 🙂 큰 돈을 벌지 못해도, 남들이 우러러보는 인생을 살지 못해도 괜찮다. 본인을 믿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부끄러움없이 떳떳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난 오늘도 아낌없이 표현한다.